10년간 외지 생활을 하면서 가끔 왜 이 이 단어가 이렇게 불리울까 하고,
태어나서 부터 써온 단어들에 의아해 한적이 좀 있다.
10년간 못되먹은 영어 욕은 있는것 다 배우고 왔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 엄청난 욕이 상기 된 배경이 있지만, 그건 뒤로 하고,
이 아주 감칠맛 나면서 약간은 귀여운 맛이 있는 욕, <쪼다> 를 언급하고자 한다.
욕은 주로 우리에게 강도의 세기로 단위화 되어 사용된다.
그의 문화적 배경이나 음율의 느낌, 상황/상태의 적절성등은 많이 고려치 않고 사용한다.
우선 <쪼다> 라고 말해보자....
자신도 모르게 사랑스럽게 나오지 않는가?!
물론 당신은 비열하게 말을 했을수도 있다.
예를 들면 뭐, 쪼!다~! 이렇게... 그건 내가 전 긍정의 의미로 내비친것의 반항이거나 당신의 사회적 심리성을 의심해 볼것으로 여기겠다.
난 이 단어가 '사람이 무엇엔가 기가 죽어 쉽게 쫄다' 하는 의미의 욕으로 누군가 제 기를 다 펼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로, '바보'의 다른 말이라고 해석 했다.
그런데 여기서 '기가 쫄다'는 표준어처럼 쓸수 있나? 사투리 인가 욕인가??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뒤져보니,
쪼다 [명사]
‘덜떨어져서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낮추보아 이르는 말
이라고 되어 있다. 더 영어로 내가 silly 라고 해석을 했더라면 여기서는 retarded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조금 강도 높은 욕처럼 들린다!
더 쇼크한 것은 다음이다. 이 말의 배경인데, 이것이 왕! 의 이름.... 이 아니라 왕이 될뻔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
네이버인 들이 말하길...
"유래는 옛날에 '조다'라는 왕조가 있었는데
성함락 등등 아주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왕에 못오르고 죽어버려서
쪼다~쪼다 라고 부릅니다"
그사람 이런 빛나는 단어의 영구적 업적론은 누가 감히 언급할것인가.
성함락 등등은 관심 없다. 그는 우리에게 이 <쪼다>라는 단어를 주고 이세상을 떠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을 증명 하듯 말이다.
a
Wednesday, April 13, 2011
Monday, April 11, 2011
가깝지만 먼 존재들
우리 삶엔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존재들이 있다.
가까이 있는 일본, 혹은 동남아 나라들도 지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그들의 문화나 사회적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거리감이 있다.
사람사이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정도에 따라 우린 멀리 느끼기도 하고 가깝게 느끼기도 한다.
멀리에서 사는 남자들만 만난 나는 반대로 그들이 가깝게 느껴진 한 예다.
늘 서로 생각하고, 늘 전화/통신에 의존한 교류 만으로도 존재적 가치와 부피는 누구와도 견줄수 없이 커 멀리 사는 그들이 멀지 않게 느껴 졌었다.
주로... 이건 초반에 더욱 해당하는 말이 겠고...
그런 교류가 쌓인다는 것은 애정도 같이 쌓아 진다는 뜻이다. 애정이 쌓아 질수록
상대방에 기대하는 바들이 커지거나 방향을 달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엔 언젠가 트러블이 생긴다.
트러블이 쌓이고 쌓여 지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것도 물론... 늘 애정을 나누던 전화상으로...
사랑은 결국 '지침' exhaustion 에 지는 것인가? 그 지침 안에서도 난 아직 애정이 있다고 믿는다.
지침에 의한 헤어짐은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힘든 무게를 내려 놓는 거.
그렇게 나온 헤어짐은 서로를 오랫동안 힘들게 한다.
그 지침은 강한 애정에서 온다.
먼거리에서 하는 연예야, 늘 혼자 하던거 하고 내 삶을 살고 있다가 가끔 만나면 사랑의 추억을 만들고, 또 다시 만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싱글 이었을때나, 멀리 사는 님들과 관계를 이어가도 내 궁극적 삶의 모습은 많이 변하지 않는다.
전화만 많이 할뿐...
만약 적당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나는 관계 였다면, 없는 것보다야 전화상의 관계에 만족을 했을터이고, 어쩌다 만나는것에도 만족을 했을터이다. 내 일상의 삶엔 큰 변화가 오지 않으니 말이다. 문제는 자꾸 쌓여가는, 만들어지는 애정의 크기에서 드리워지는 야속함이다.
더 가까이 두고 싶고, 더 자주 보고 싶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런 연예만으로 20대를 다 보냈다.
익숙해 져야 하는 걸까? 인생의 숙명인가?
남들이 말하는 현실적 사랑은 무엇인가?
순간 지쳐 있는 스스로를 보고 왠지 안타깝다.
이 나이에 정상적인, 남들같은 연예는 어떻게 하는지 감 도 오지 않는다.
나의 이기심과 욕심들로 그들을 멀리 보내야 했다.
그들은 멀리 있다.
그러나 같이 해온 추억들로도 그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가까이 있는 일본, 혹은 동남아 나라들도 지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그들의 문화나 사회적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거리감이 있다.
사람사이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정도에 따라 우린 멀리 느끼기도 하고 가깝게 느끼기도 한다.
멀리에서 사는 남자들만 만난 나는 반대로 그들이 가깝게 느껴진 한 예다.
늘 서로 생각하고, 늘 전화/통신에 의존한 교류 만으로도 존재적 가치와 부피는 누구와도 견줄수 없이 커 멀리 사는 그들이 멀지 않게 느껴 졌었다.
주로... 이건 초반에 더욱 해당하는 말이 겠고...
그런 교류가 쌓인다는 것은 애정도 같이 쌓아 진다는 뜻이다. 애정이 쌓아 질수록
상대방에 기대하는 바들이 커지거나 방향을 달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엔 언젠가 트러블이 생긴다.
트러블이 쌓이고 쌓여 지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것도 물론... 늘 애정을 나누던 전화상으로...
사랑은 결국 '지침' exhaustion 에 지는 것인가? 그 지침 안에서도 난 아직 애정이 있다고 믿는다.
지침에 의한 헤어짐은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힘든 무게를 내려 놓는 거.
그렇게 나온 헤어짐은 서로를 오랫동안 힘들게 한다.
그 지침은 강한 애정에서 온다.
먼거리에서 하는 연예야, 늘 혼자 하던거 하고 내 삶을 살고 있다가 가끔 만나면 사랑의 추억을 만들고, 또 다시 만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싱글 이었을때나, 멀리 사는 님들과 관계를 이어가도 내 궁극적 삶의 모습은 많이 변하지 않는다.
전화만 많이 할뿐...
만약 적당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나는 관계 였다면, 없는 것보다야 전화상의 관계에 만족을 했을터이고, 어쩌다 만나는것에도 만족을 했을터이다. 내 일상의 삶엔 큰 변화가 오지 않으니 말이다. 문제는 자꾸 쌓여가는, 만들어지는 애정의 크기에서 드리워지는 야속함이다.
더 가까이 두고 싶고, 더 자주 보고 싶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런 연예만으로 20대를 다 보냈다.
익숙해 져야 하는 걸까? 인생의 숙명인가?
남들이 말하는 현실적 사랑은 무엇인가?
순간 지쳐 있는 스스로를 보고 왠지 안타깝다.
이 나이에 정상적인, 남들같은 연예는 어떻게 하는지 감 도 오지 않는다.
나의 이기심과 욕심들로 그들을 멀리 보내야 했다.
그들은 멀리 있다.
그러나 같이 해온 추억들로도 그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Tuesday, June 8, 2010
Ending of my 유학 life
2010 년.
10년 간의 나의 긴 유학 생활은 드디어 끝이 났다.
지금은 나의 고향에서 현실을 적응하는 중이지만
아무튼 이곳을 빌미로 난 이 썩은 기억력으로 기억나는 순간 순간 이곳에 내 추억들을 담기로 했다. 막상 쓰러 오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당혹 스럽다.. 물론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말하지 않았는가, 이 썩은 기억력... 저주한다!
한국에서 사회생활 한 지도 벌써 한달!!!
난 또다른 나의 모습에 놀랐다.
한국에 와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또다른 컬쳐샥(Culture shock)* 을 은근 많이 받고 있었다.
한국인이 한국 문화에 놀라는 기분은 좀.. 이상하다.
*새로운 문화에 놀라는 것
우선 모두들 열~심히 사는것에 감동이다.
앞으로 종종 한국에서의 그 컬쳐샥에 대해서도 쓸 계획이다.
옛날 지난 캐나다 일부터 쓰고 싶었지만 이 썩은 브래인, 에디팅 잘된 영화처럼 스토리 전개 못하겠다.
내 브래인은 대충 찍어놓은, 은근 예술성 돋보이는 폴라로이드 snap shot사진들을 마구 마구 섞어 놓은것 같이 기억들을 저장해 놓는다.
내 친한 친구 S 씨는 언제 무엇을 무엇에 관한 대화 내용을 옛 영화를 꺼내 보듯 서론 본론 결론 까지 술술 늘어 놓는다.
.
.
.
그래서 인지 난 '레디오 해드' 의 '스케터브래인' 을 좋아한다....
Radiohead - Scatterbrain
10년 간의 나의 긴 유학 생활은 드디어 끝이 났다.
지금은 나의 고향에서 현실을 적응하는 중이지만
아무튼 이곳을 빌미로 난 이 썩은 기억력으로 기억나는 순간 순간 이곳에 내 추억들을 담기로 했다. 막상 쓰러 오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당혹 스럽다.. 물론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말하지 않았는가, 이 썩은 기억력... 저주한다!
한국에서 사회생활 한 지도 벌써 한달!!!
난 또다른 나의 모습에 놀랐다.
한국에 와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또다른 컬쳐샥(Culture shock)* 을 은근 많이 받고 있었다.
한국인이 한국 문화에 놀라는 기분은 좀.. 이상하다.
*새로운 문화에 놀라는 것
우선 모두들 열~심히 사는것에 감동이다.
앞으로 종종 한국에서의 그 컬쳐샥에 대해서도 쓸 계획이다.
옛날 지난 캐나다 일부터 쓰고 싶었지만 이 썩은 브래인, 에디팅 잘된 영화처럼 스토리 전개 못하겠다.
내 브래인은 대충 찍어놓은, 은근 예술성 돋보이는 폴라로이드 snap shot사진들을 마구 마구 섞어 놓은것 같이 기억들을 저장해 놓는다.
내 친한 친구 S 씨는 언제 무엇을 무엇에 관한 대화 내용을 옛 영화를 꺼내 보듯 서론 본론 결론 까지 술술 늘어 놓는다.
.
.
.
그래서 인지 난 '레디오 해드' 의 '스케터브래인' 을 좋아한다....
Radiohead - Scatterbrain
Thursday, March 11, 2010
"나의 의견" 이란 무엇인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언어며, 문화며, 여러가지 적응 하기 힘들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중 정말 늘 날 혼란시키고, 날 시험에 들게한 것은 의외로 하나의 문제(a question) 였다.
What is my opinion?
말 그대로 내 의견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쓰거나 질문을 할때였다.
난 한국에서 늘 중립의 미를 믿어왔었다. 싫지도 좋지도, 맞다 아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가 아닌 그럴수도 이럴수도 있는 것, 흑백 논리 보다도 회색논리를 지지 했다. 그렇게 argue 해봤자 삶을 짧다는 얼토 당토 한 철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건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결과에 불과 했고, 세상은 중립적인 아이디어를 갖은 사람에 의해 돌아가는게 아니라, 한 주장을 갖고 믿음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난 힘들게 배웠다.
에세이 숙제를 할때마다, 늘 인자하신 우리 선생님들 께서, "여기에 너의 주장이 들어가지 않았구나. 다시 해와라" 며 친절한 빠꾸를 주신 덕에 난 내 주장, 아이디어에 생각을 하기 시작 했고, 발전할수 있었다.
그리고 곧, 내가 그것에 잘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주장 만들고, 의견 내세우기....
한국 정서에 심하게 반항적인 느낌이 오지만, 나에겐 유학생활의 '살아남는 방법' 이 돼었고, 나를 더 잘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사회에서도, 내 의견 즉, YES or NO 를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하거나,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서 손해를 볼일이 참 많다.
작은 예를 들면, 파티에서,
"어머 넌 누구니?"
"어.... 난 누구랑 같이 따라왔어..." (나)
"그래? 반가워. 뭐 마실거 줄까?"
"아... 아니야, 괜찮아..."
순간 머리속엔 내가 마실것을 원하냐 안원하냐는 생각치 못한다.
버릇처럼 나온 나의 한국인의 "한번은 거절" 예절에 벌써 "노" 라는 대답을 듣고 등 돌린 파티녀가 보인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난 음료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마시고... 라는 답이 마음에서 왔지만,
짧은 영어로 사람들과 잘 끼지도 못하던 나는 그냥 쭈삣한게 싫어 음료라도 들고 있기로 결심한다. 그리곤 주방으로 가서, 한국인 정서로 또 그냥 어정쩡 (akward) 하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한명이 센스있게 물어봐 준다. "뭐 줄까? 뭐 마실레?"
그럼 난 순간 무슨 음료를 내가 원하는지 생각을 미쳐 못했음을 깨닫는다.
"어...음... 나 너랑 같은거..."
.
.
.
.
정말 싫지 않은가... 나 자신을 모른다는거...
나의 의견이/주장이 곧지 않다는거...
정말 unattractive 매력 없음에 극치 이다....
몇년이 지난후 더이상 나의 그런 옛 모습이 없다는것에 난 흠칫 놀랐다.
그중 정말 늘 날 혼란시키고, 날 시험에 들게한 것은 의외로 하나의 문제(a question) 였다.
What is my opinion?
말 그대로 내 의견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쓰거나 질문을 할때였다.
난 한국에서 늘 중립의 미를 믿어왔었다. 싫지도 좋지도, 맞다 아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가 아닌 그럴수도 이럴수도 있는 것, 흑백 논리 보다도 회색논리를 지지 했다. 그렇게 argue 해봤자 삶을 짧다는 얼토 당토 한 철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건 나로 하여금 나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결과에 불과 했고, 세상은 중립적인 아이디어를 갖은 사람에 의해 돌아가는게 아니라, 한 주장을 갖고 믿음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난 힘들게 배웠다.
에세이 숙제를 할때마다, 늘 인자하신 우리 선생님들 께서, "여기에 너의 주장이 들어가지 않았구나. 다시 해와라" 며 친절한 빠꾸를 주신 덕에 난 내 주장, 아이디어에 생각을 하기 시작 했고, 발전할수 있었다.
그리고 곧, 내가 그것에 잘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주장 만들고, 의견 내세우기....
한국 정서에 심하게 반항적인 느낌이 오지만, 나에겐 유학생활의 '살아남는 방법' 이 돼었고, 나를 더 잘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사회에서도, 내 의견 즉, YES or NO 를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하거나,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서 손해를 볼일이 참 많다.
작은 예를 들면, 파티에서,
"어머 넌 누구니?"
"어.... 난 누구랑 같이 따라왔어..." (나)
"그래? 반가워. 뭐 마실거 줄까?"
"아... 아니야, 괜찮아..."
순간 머리속엔 내가 마실것을 원하냐 안원하냐는 생각치 못한다.
버릇처럼 나온 나의 한국인의 "한번은 거절" 예절에 벌써 "노" 라는 대답을 듣고 등 돌린 파티녀가 보인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난 음료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마시고... 라는 답이 마음에서 왔지만,
짧은 영어로 사람들과 잘 끼지도 못하던 나는 그냥 쭈삣한게 싫어 음료라도 들고 있기로 결심한다. 그리곤 주방으로 가서, 한국인 정서로 또 그냥 어정쩡 (akward) 하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한명이 센스있게 물어봐 준다. "뭐 줄까? 뭐 마실레?"
그럼 난 순간 무슨 음료를 내가 원하는지 생각을 미쳐 못했음을 깨닫는다.
"어...음... 나 너랑 같은거..."
.
.
.
.
정말 싫지 않은가... 나 자신을 모른다는거...
나의 의견이/주장이 곧지 않다는거...
정말 unattractive 매력 없음에 극치 이다....
몇년이 지난후 더이상 나의 그런 옛 모습이 없다는것에 난 흠칫 놀랐다.
Wednesday, September 23, 2009
깜박 깜박 하는 나.
언어적 센스가 적은 나는 영어-한국어 스위치가 가끔 잘 돌아가지 않을때가 있다.
오늘 급히 서울 경복궁에서 강남으로 내려 오는데, 지하철 출구가 좀 멀다 싶어,
앞에 늠늠히 서 계신 젊은 경찰 을 잡고 물었다.
"여기 가까운..."
순간, 요즘 통역으로 영어를 더 많이 쓴 나는 지하철이란 단어가 빨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 서브웨이 어딘지 아세요? "
"잘 모르겠는데... 여긴 없는거 같은데..."
"저... 지하철이요..."
"아, 네... 왼쪽으로 죽 가세요."
ㅡㅡ;
이분, 심하게 샌드위치 파는 "서브웨이" 로 생각하셨던 것이었다.
나름 피식 웃게 만든 시츄에시션 이었다.
오늘 급히 서울 경복궁에서 강남으로 내려 오는데, 지하철 출구가 좀 멀다 싶어,
앞에 늠늠히 서 계신 젊은 경찰 을 잡고 물었다.
"여기 가까운..."
순간, 요즘 통역으로 영어를 더 많이 쓴 나는 지하철이란 단어가 빨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 서브웨이 어딘지 아세요? "
"잘 모르겠는데... 여긴 없는거 같은데..."
"저... 지하철이요..."
"아, 네... 왼쪽으로 죽 가세요."
ㅡㅡ;
이분, 심하게 샌드위치 파는 "서브웨이" 로 생각하셨던 것이었다.
나름 피식 웃게 만든 시츄에시션 이었다.
Thursday, September 10, 2009
캐나다 고등학교 들어가기
영어를 정말 너무 못하던 나
는 6개월 정도의 영어 연수 기간 동안 좋다는
캐나다 고등학교 몇군데를 알아보았다.
이런... SSAT라는 영어 시험점수가 있어야 받아주는 학교 들이었다.
공부했다. 그러나 기본 회화에서 쩔쩔매는 내가 쬠 공부했다고 좋은 성적을 받을리 없다.
얼토당토않는 점수 가지고, 그래도 자기들이 주는 시험 패스 하면 받아주겠다는 학교를 방문,
학교도 구경하고 시험들도 봤다.
첨에 학교 정보 구할때 받은 카달로그를 본 첫 느낌은 정말 잊을수가 없다.
고등학교 카달로그라...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너무 예쁘게 만들어진, 펴는 페이지마다 영화에나 나올퍽한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고등학생들은 거의 픽션에 가까웠고, 내가 기대하던 고등교육 과 상상도 할수 없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떠날 당시만 해도 그 유치한 세일러문이 유행이었다. 개나 소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를줄 알았엇다. 난 그 카달로그의 고딩들이 진심으로 세일러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침을 흘리며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이 공부를 한다는 상상을 했다. 학교마다 있는 카달로그를 보고 또 보며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던 것이다!
.
.
.
.
.
많은 학교에서 SSAT 점수 때문에 거절 당할때 까지.... ㅡㅡ;
난 공부를 잘 해서 유학간게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서 간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 일년 삼분의 이를 미술 실기를 하면서 한 공부는 보통 고딩들의 수준 이하였을것이라 으레 짐작한다.
그럼 왜 유학을 가게 됬냐고?
집에서 가라고 해서?
집에선 처음에 완강히 반대 하셨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제안 이었을 것이다. 난 그들이 반대 할수 없도록 이유와 기대 결과, 목표들을 정확히 작성해 부탁 드렸다.
결과는 역시 그들은 반대 할수 없었었다.
난 그냥.. 가야 한다는, 내가 가야만 더 발전할수 있다는, 그 뭔가 모자란 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활발한 나도 아니었고, 공부도 그냥 그랬지만 새로운 그 무언가 를 배운다는 것을 난 미치도록 원했고, 할수 있다고 너무 당연히 믿어졌다. 머리 는 좋지 않은게 열정만 철철 넘친 미숙아 였던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가, 무식하면 용감 하다고...
2009년 올해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 라는 영화에서도 선수중 조금 모자란 동생이 형이 하는걸 보고, 자신이 롤러코스터 트랙에 스키 점프 연습대를 설치 한다.
그리고 겁없이 뛰어든다.
그 옛날 10년 전 내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ㅡㅡ
영어를 못해도 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속은 많이 상했었다.)
많이 안배워서 그러니까, 그럼 많이 배우면 되는것이었으니까.
결국 학교 자체 시험 본 곳중 하나가 내가 같이 들고간 작품 포트폴리오 덕 이었을까? 받아 주셨고, 그 곳에서 졸업했다. 그렇다. 영어가 안되어, 융통성 있는 학교에선 좀 받아주겠지 한거다.
반응은 좋았다. 누가 한국에서 배운 테크닉 적인 작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있는가.
로봇처럼 배웠는데.
그렇게 난 촌구석에 나무와 좋은공기, 좋은 집들로 둘러싸인 작은 여학교 에 입학했다.
.
.
.
.
.
.
....
는 6개월 정도의 영어 연수 기간 동안 좋다는
캐나다 고등학교 몇군데를 알아보았다.
이런... SSAT라는 영어 시험점수가 있어야 받아주는 학교 들이었다.
공부했다. 그러나 기본 회화에서 쩔쩔매는 내가 쬠 공부했다고 좋은 성적을 받을리 없다.
얼토당토않는 점수 가지고, 그래도 자기들이 주는 시험 패스 하면 받아주겠다는 학교를 방문,
학교도 구경하고 시험들도 봤다.
첨에 학교 정보 구할때 받은 카달로그를 본 첫 느낌은 정말 잊을수가 없다.
고등학교 카달로그라...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너무 예쁘게 만들어진, 펴는 페이지마다 영화에나 나올퍽한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고등학생들은 거의 픽션에 가까웠고, 내가 기대하던 고등교육 과 상상도 할수 없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떠날 당시만 해도 그 유치한 세일러문이 유행이었다. 개나 소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를줄 알았엇다. 난 그 카달로그의 고딩들이 진심으로 세일러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침을 흘리며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이 공부를 한다는 상상을 했다. 학교마다 있는 카달로그를 보고 또 보며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던 것이다!
.
.
.
.
.
많은 학교에서 SSAT 점수 때문에 거절 당할때 까지.... ㅡㅡ;
난 공부를 잘 해서 유학간게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서 간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 일년 삼분의 이를 미술 실기를 하면서 한 공부는 보통 고딩들의 수준 이하였을것이라 으레 짐작한다.
그럼 왜 유학을 가게 됬냐고?
집에서 가라고 해서?
집에선 처음에 완강히 반대 하셨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제안 이었을 것이다. 난 그들이 반대 할수 없도록 이유와 기대 결과, 목표들을 정확히 작성해 부탁 드렸다.
결과는 역시 그들은 반대 할수 없었었다.
난 그냥.. 가야 한다는, 내가 가야만 더 발전할수 있다는, 그 뭔가 모자란 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활발한 나도 아니었고, 공부도 그냥 그랬지만 새로운 그 무언가 를 배운다는 것을 난 미치도록 원했고, 할수 있다고 너무 당연히 믿어졌다. 머리 는 좋지 않은게 열정만 철철 넘친 미숙아 였던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가, 무식하면 용감 하다고...
2009년 올해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 라는 영화에서도 선수중 조금 모자란 동생이 형이 하는걸 보고, 자신이 롤러코스터 트랙에 스키 점프 연습대를 설치 한다.
그리고 겁없이 뛰어든다.
그 옛날 10년 전 내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ㅡㅡ
영어를 못해도 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속은 많이 상했었다.)
많이 안배워서 그러니까, 그럼 많이 배우면 되는것이었으니까.
.
.
.
.
그러나 6개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도, 언어의 벽은 꽤나 높았다.
그러나 6개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도, 언어의 벽은 꽤나 높았다.
반응은 좋았다. 누가 한국에서 배운 테크닉 적인 작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있는가.
로봇처럼 배웠는데.
그렇게 난 촌구석에 나무와 좋은공기, 좋은 집들로 둘러싸인 작은 여학교 에 입학했다.
.
.
.
.
.
.
....
Tuesday, September 8, 2009
조치 안았던 한인 하숙집
엄마가 날 두고 가신 곳은 다크서클 많이 져 있는 싱글 아줌마 집이었다.
밥은 이야기 한것과 다르게, 마른반찬 몇개만 나오고, 눈치를 밥 한공기 가득 보다 더 주시는 그런 분이 셨다.
그곳에는 나 말고 곧 다른 언니 오빠 들이 들어왔는데, 나보다 조금 나이 더 있는 자매가 라면 하나 끓이기 위해, 아줌마 있나 없나 여부와 그의 딸의 존재까지 파악후 007 작전으로 라면 끓어 먹던게 생각이 난다. 워낙 눈치주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자매는 더욱 그것을 주시 했다.
난 그곳에서 한달 있은후, 나가기로 결정, 아줌마에게 한달 더 낸 랜트비 반납을 요구 했다.
그것은 디파짓으로 그때 나는 그게 뭔 개념인지도 몰랐다.
아줌마는 너가 들어올때, 첫달 랜트랑 마지막달 랜트를 디파짓으로 낸것이니, 한달을 더 있어야 하거나 포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의 눈치밥은 두 그릇이었다.
가끔 두 딸들이 우리 하숙생을 방에 들어와 살살 눈치보며 이것저것 보고 만지고 물어보고
눈치 준일들이 생각난다.
세상 공부밖에 모르던 난, 우리나라에 흔히 존재 한다는 (이 사실도 나중에 배운) 그 눈칫밥을 적날하게 먹어봤다.
토론토 에서, 아는 것도 없고, 그냥 다운타운 이튼 몰에 어쩌다 가보겠다고 좀 깨끗하게 입고 나오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훝어보시며, "어디..가니..?" 라고 전기세 아끼신다고 어두껌껌한 주방에서 그 다크 서클한 눈으로 날 쳐다보시며 물어보신게 생각이 난다.
그곳에서 옆방 컴퓨터 잘하는 오빠 (좀 젊은 아저씨였다 그때 나에겐) 한테 처음 사서 처음 써보는 컴퓨터 노트북 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도 생각난다. 나중에 그렇게 홀로 외로워 하던 오빤 어쩌다 내가 캐나다 학교 졸업하고 한국 들어가는 공항에서 오빠의 임신한 부인과 함께마주쳤다.
사운드를 중요시 하던 오빠는 그 작은 방 곳곳 사방 팔방에 스피커를 설치 해, 영화 한편을 보여주었는데, 그 영향은 나로 하여금 좋은 스피커 없이 본 영화는 본것 같지도 않게 만들어 버렸다. 나중에 유학 하면서 스피커가 쌍으로 2개, 총 4개 있었다.
그렇게 조치 않았던 한인 아줌마와의 하숙 인연은 2개월로 마감했지만 너무도 길고긴 2달 이었다.
밥은 이야기 한것과 다르게, 마른반찬 몇개만 나오고, 눈치를 밥 한공기 가득 보다 더 주시는 그런 분이 셨다.
그곳에는 나 말고 곧 다른 언니 오빠 들이 들어왔는데, 나보다 조금 나이 더 있는 자매가 라면 하나 끓이기 위해, 아줌마 있나 없나 여부와 그의 딸의 존재까지 파악후 007 작전으로 라면 끓어 먹던게 생각이 난다. 워낙 눈치주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자매는 더욱 그것을 주시 했다.
난 그곳에서 한달 있은후, 나가기로 결정, 아줌마에게 한달 더 낸 랜트비 반납을 요구 했다.
그것은 디파짓으로 그때 나는 그게 뭔 개념인지도 몰랐다.
아줌마는 너가 들어올때, 첫달 랜트랑 마지막달 랜트를 디파짓으로 낸것이니, 한달을 더 있어야 하거나 포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의 눈치밥은 두 그릇이었다.
가끔 두 딸들이 우리 하숙생을 방에 들어와 살살 눈치보며 이것저것 보고 만지고 물어보고
눈치 준일들이 생각난다.
세상 공부밖에 모르던 난, 우리나라에 흔히 존재 한다는 (이 사실도 나중에 배운) 그 눈칫밥을 적날하게 먹어봤다.
토론토 에서, 아는 것도 없고, 그냥 다운타운 이튼 몰에 어쩌다 가보겠다고 좀 깨끗하게 입고 나오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훝어보시며, "어디..가니..?" 라고 전기세 아끼신다고 어두껌껌한 주방에서 그 다크 서클한 눈으로 날 쳐다보시며 물어보신게 생각이 난다.
그곳에서 옆방 컴퓨터 잘하는 오빠 (좀 젊은 아저씨였다 그때 나에겐) 한테 처음 사서 처음 써보는 컴퓨터 노트북 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도 생각난다. 나중에 그렇게 홀로 외로워 하던 오빤 어쩌다 내가 캐나다 학교 졸업하고 한국 들어가는 공항에서 오빠의 임신한 부인과 함께마주쳤다.
사운드를 중요시 하던 오빠는 그 작은 방 곳곳 사방 팔방에 스피커를 설치 해, 영화 한편을 보여주었는데, 그 영향은 나로 하여금 좋은 스피커 없이 본 영화는 본것 같지도 않게 만들어 버렸다. 나중에 유학 하면서 스피커가 쌍으로 2개, 총 4개 있었다.
그렇게 조치 않았던 한인 아줌마와의 하숙 인연은 2개월로 마감했지만 너무도 길고긴 2달 이었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