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3, 2009

깜박 깜박 하는 나.

언어적 센스가 적은 나는 영어-한국어 스위치가 가끔 잘 돌아가지 않을때가 있다.

오늘 급히 서울 경복궁에서 강남으로 내려 오는데,  지하철 출구가 좀 멀다 싶어,
앞에 늠늠히 서 계신 젊은 경찰 을 잡고 물었다.

"여기 가까운..."

순간, 요즘 통역으로 영어를 더 많이 쓴 나는 지하철이란 단어가 빨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 서브웨이 어딘지 아세요? "
"잘 모르겠는데... 여긴 없는거 같은데..."

"저... 지하철이요..."
"아,  네... 왼쪽으로 죽 가세요."

ㅡㅡ;

이분, 심하게 샌드위치 파는 "서브웨이" 로 생각하셨던 것이었다.
나름 피식 웃게 만든 시츄에시션 이었다.

Thursday, September 10, 2009

캐나다 고등학교 들어가기

영어를 정말 너무 못하던 나
는 6개월 정도의 영어 연수 기간 동안 좋다는


캐나다 고등학교 몇군데를 알아보았다.


이런... SSAT라는 영어 시험점수가 있어야 받아주는 학교 들이었다.


공부했다. 그러나 기본 회화에서 쩔쩔매는 내가 쬠 공부했다고 좋은 성적을 받을리 없다.


얼토당토않는 점수 가지고, 그래도 자기들이 주는 시험 패스 하면 받아주겠다는 학교를 방문,
학교도 구경하고 시험들도 봤다.


첨에 학교 정보 구할때 받은 카달로그를 본 첫 느낌은 정말 잊을수가 없다.



고등학교 카달로그라...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너무 예쁘게 만들어진, 펴는 페이지마다 영화에나 나올퍽한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고등학생들은 거의 픽션에 가까웠고, 내가 기대하던 고등교육 과 상상도 할수 없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떠날 당시만 해도 그 유치한 세일러문이 유행이었다. 개나 소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를줄 알았엇다. 난 그 카달로그의 고딩들이 진심으로 세일러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침을 흘리며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이 공부를 한다는 상상을 했다. 학교마다 있는 카달로그를 보고 또 보며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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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교에서 SSAT 점수 때문에 거절 당할때 까지.... ㅡㅡ;




난 공부를 잘 해서 유학간게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서 간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일주, 일년 삼분의 이를 미술 실기를 하면서 한 공부는 보통 고딩들의 수준 이하였을것이라 으레 짐작한다.



그럼 왜 유학을 가게 됬냐고?

집에서 가라고 해서?
집에선 처음에 완강히 반대 하셨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제안 이었을 것이다. 난 그들이 반대 할수 없도록 이유와 기대 결과, 목표들을 정확히 작성해 부탁 드렸다.

결과는 역시 그들은 반대 할수 없었었다.


난 그냥.. 가야 한다는, 내가 가야만 더 발전할수 있다는, 그 뭔가 모자란 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활발한 나도 아니었고, 공부도 그냥 그랬지만 새로운 그 무언가 를 배운다는 것을 난 미치도록 원했고, 할수 있다고 너무 당연히 믿어졌다. 머리 는 좋지 않은게 열정만 철철 넘친 미숙아 였던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가, 무식하면 용감 하다고...


2009년 올해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 라는 영화에서도 선수중 조금 모자란 동생이 형이 하는걸 보고, 자신이 롤러코스터 트랙에 스키 점프 연습대를 설치 한다.


그리고 겁없이 뛰어든다.

그 옛날 10년 전 내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ㅡㅡ




영어를 못해도 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속은 많이 상했었다.)

많이 안배워서 그러니까, 그럼 많이 배우면 되는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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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개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도, 언어의 벽은 꽤나 높았다.

 
결국 학교 자체 시험 본 곳중 하나가 내가 같이 들고간 작품 포트폴리오 덕 이었을까? 받아 주셨고, 그 곳에서 졸업했다. 그렇다. 영어가 안되어, 융통성 있는 학교에선 좀 받아주겠지 한거다.



반응은 좋았다. 누가 한국에서 배운 테크닉 적인 작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있는가.
로봇처럼 배웠는데.



그렇게 난 촌구석에 나무와 좋은공기, 좋은 집들로 둘러싸인 작은 여학교 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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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8, 2009

조치 안았던 한인 하숙집

엄마가 날 두고 가신 곳은 다크서클 많이 져 있는 싱글 아줌마 집이었다.
밥은 이야기 한것과 다르게, 마른반찬 몇개만 나오고, 눈치를 밥 한공기 가득 보다 더 주시는 그런 분이 셨다.

그곳에는 나 말고 곧 다른 언니 오빠 들이 들어왔는데, 나보다 조금 나이 더 있는 자매가 라면 하나 끓이기 위해, 아줌마 있나 없나 여부와 그의 딸의 존재까지 파악후 007 작전으로 라면 끓어 먹던게 생각이 난다. 워낙 눈치주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자매는 더욱 그것을 주시 했다.

난 그곳에서 한달 있은후, 나가기로 결정, 아줌마에게 한달 더 낸 랜트비 반납을 요구 했다.
그것은 디파짓으로 그때 나는 그게 뭔 개념인지도 몰랐다.
아줌마는 너가 들어올때, 첫달 랜트랑 마지막달 랜트를 디파짓으로 낸것이니, 한달을 더 있어야 하거나 포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의 눈치밥은 두 그릇이었다.

가끔 두 딸들이 우리 하숙생을 방에 들어와 살살 눈치보며 이것저것 보고 만지고 물어보고
눈치 준일들이 생각난다.
세상 공부밖에 모르던 난, 우리나라에 흔히 존재 한다는 (이 사실도 나중에 배운) 그 눈칫밥을 적날하게 먹어봤다.

토론토 에서,  아는 것도 없고, 그냥 다운타운 이튼 몰에 어쩌다 가보겠다고 좀 깨끗하게 입고 나오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훝어보시며,   "어디..가니..?" 라고 전기세 아끼신다고 어두껌껌한 주방에서 그 다크 서클한 눈으로 날 쳐다보시며 물어보신게 생각이 난다.


그곳에서 옆방 컴퓨터 잘하는 오빠 (좀 젊은 아저씨였다 그때 나에겐) 한테 처음 사서 처음 써보는 컴퓨터 노트북 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도 생각난다.  나중에 그렇게 홀로 외로워 하던 오빤 어쩌다 내가 캐나다 학교 졸업하고 한국 들어가는 공항에서 오빠의 임신한 부인과 함께마주쳤다.

사운드를 중요시 하던 오빠는 그 작은 방 곳곳 사방 팔방에 스피커를 설치 해, 영화 한편을 보여주었는데, 그 영향은 나로 하여금 좋은 스피커 없이 본 영화는 본것 같지도 않게 만들어 버렸다. 나중에 유학 하면서 스피커가 쌍으로 2개, 총 4개 있었다. 

그렇게 조치 않았던 한인 아줌마와의 하숙 인연은 2개월로 마감했지만 너무도 길고긴 2달 이었다.

유학의 첫 걸음 캐나다에서 시작 하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게 된 유학길.
다행이도, 아버지 친구 딸 도 준비중에 있었기에 우리 부모님도 같이 보내기로 결정, 그쪽 어머니와 딸, 나와 울 어머니와 각각 딸들짐만 4개씩 보따리 싸와 그 친구 어머니의 친구집에 몇일 묵으며 동내 한인 교차로를 뒤지며 내가 나갈집을 찾았다.

그때, 반지하 (대부분의 북미쪽 집은 반지하도 윗방 다르지 않게 좋다.) 에서 작은 방에서 엄마와 나 둘이 잤는데,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서 옛 친정에서 들리던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가 좋았다고 했다. 나도 들었고, 아침에 들리는데, 꽤 로맨틱 했었다.

헌데 나중에 정말 몇~년이 흐르고 알았지만 그 소리는 한국에선 들을수 없었던 레디에이터(히터)의 김새는 소리였다!

엄만 내가 먹는것 때문에 걱정이 되서 한인을 원하셨다.
난 지내는것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거 같다.
어느 아주머니 집에 들어갔다. 혼자 딸 둘을 데리고 하숙을 목적으로 큰집에 사시는 분이었다.
엄만 이리 저리 구경하고, 이집을 하자고 하셔, 그러자고 하고, 난 힘든 캐나다 적응 생활을 시작했다.
엄만 그리고 4일후 우시며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난 독하다. 그런거 같다. 미국 나이로 17살에 영어도 지질이 못하던 난, 모르는게 용감하다는 말을 실감하듯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공항에서도, 엄마가 캐나다를 떠날때도.

막 시작된 새 인생에 너무 벅차 있었던 걸까?

나이는 바로 고등학교를 들어가야할 나이였지만, 언어 때문에 그 아빠친구딸과 난 영어 연수 기관에 들어갔다. 
그곳은 그때 나에게 "해븐" 이었다.

처음 만난 자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교 들어간 학생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영어 지질이 못해 역시 1급 수업 (8급 까지 수준이 나뉘어져 있었다.) 부터 듣기 시작 했다.




다음...

내 20대의 짧지 않았던 10년 인생을 간단히

그래 간단히만.

유학생으로
캐나다 가서 고딩 끝내고

미국가서 대학 졸업, 대학원 졸업...
그러고 나니 20대 얌전히 다 가더라.

미술 공부한탓에 백수.
미술 공부한 탓에 백수라도 많이는 부끄럽지 않아. (오직 쪼오..금)
그치만 미술 공부한탓에 나 좀 배고파.

그래도 하고싶은거 해서 나름 기죽지 않고 산다.

츄루 블로깅의 시작이다.

TRUE BLOGGING HAS BEGUN!

음... 만날 앉아서 컴만하는 나에게 어느날 떡 하니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

생각해보면 이레저레 고생도 하고 경험도 많이 쌓고 역마살 제대로 낀 인생으로
이곳저곳 많이 돌아 댕겼다.

그래... 거의 십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가는 그...십년.
그래서 너무 길고긴 나의 20대 청춘을 하나 하나 시간대로 쓰기엔 내머리가 좀 안좋구,
생각나는 대로 갈기는 그런 일기 한번 써보기로 생각했다.

그것이 이 늦은밤 한국에서 갑자기 떠오른....작은 "아이디어 하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