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ly 11, 2016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와인을 한잔 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음악을 틀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여기 글을 쓴다.
그런데 기분이 더 좋아지진 않는다.

그러니 잠이나 자야겠다.

그래서가 그런데를 넘어 더 좋을때가 있다.
언제는 그런데가 희망이었는데. ㅋ



Friday, April 29, 2016

수트

그는 걷고 있다.

마치 영화의 슬로우모션처럼 그는 그렇게 천천히 걷는다.
나의 귀는 그의 잘 닦여진 구두가 만들어 내는 또각 또각 소리에 집중한다.

세상이란 무대엔 그 혼자이고, 그를 중심으로 둔 배경은 모두 하얗다.

검은 양복, 아주 매트한 그의 수트는 손목에 하얀 셔츠의 소매를 적당히 내밀고 있다.
짧게 깎아 올린 그의 머리끝 목선을 따라 단호히 존재감들 드러내는 하얀 카라.


그의 힙을 살짝 가린듯한 두 갈래로 나누어진 잉글리쉬 컷은 그의 구두소리와 같은 리듬으로 펄럭 거린다.

일자로 뻗은 강한 라인의 바지선은 그가 한 걸음 내 딛을때마다 그의 넓은 허벅지 라인을 보일듯 말듯 드러내고, 아래 바짓단은 적당히 춤을 춘다.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가던 그는 이미 무대를 벗어나고
아, 그 아름다움에 빠져 얼굴은 보지 못 했구나...

그래도 괜찮다.
이미 그의 수트가 그에 대해 다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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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요즘 을지로와 여의도에 일을 다니며 퇴근시간의 양복입은 남자들을 많이 접한다.
미국남자들에 비해 난 한국 남자들이 수트를 잘 입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내 혼이 빠질 만큼. 넋이 나가 도록 바라본다.
수트는 진정 인간사에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라 말하고 싶다.



Thursday, April 28, 2016

소음

우리 건물엔 젊고 잘생긴 남자 가수가 산다.
그는 한때 자기방에서 늦은 밤부터 새벽 까지 쉬지 않고 열창을 하곤 했다.
대각선으로 윗층사는 나에게 가사 까지 들릴 정도로 아니, 건물 밖에서도 들릴 정도 였다.
예술 종사자 인가 싶어 참다가 연속최대 5시간 연습, 무직에 아침 점심 저녁 을 가리지 않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볼수 있도록 엘레베이터에 노트를 붙였다.
90년대의 좋은 곡으로 늦은 밤까지 노래 자랑 잘 들었다고, 다음엔 경찰과 듣겠다고 썼다. (그는 오직 한 노래만 불렀다.)
몇시간 후 나가보니 노트는 없어졌고 밤에 노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후 그는 남들이 꿈나라에서 절대 깰수 없는, 그러나 내겐 취침 시간인 새벽 4부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야망은 진심 높이 살만 하다.

전에 살던 곳엔 허접한 방음으로 그의 화장실 주기 까지 알수 있을 퍽한 거리의 옆방에 뮤지컬배우가 살았다. 역시 남자였다.
그도 방에서 열창을 했더 랬다. 그는 그래도 밤 10-11사이에만 했다. 그도 같은 노래를 반복적으로 했고 난 그때마다 음악 볼륨을 높여야 했다.
한번은 가사가 들리길래 그대로 인터넷에 처보니 어떤 뮤지컬 음악이었다. 그래서 그가 뮤지컬 오디션 준비생임을 알았다. 
그러나 아래층 주민이 컴플래인 한 이후로 조용해 졌다.
엄마는 그들이 연습실도 없다면 집에서 혼자 연습할 수 도 없고 불쌍하다고 했다.  

그러나 난 잠 좀 자야겠단 말이다.

Thursday, February 26, 2015

weight of your words

고독의 무게가 더욱이 느껴지는 날엔
너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

벌써 6년전의 이야기지만
그때 너의 말이 맞았어

나에게 쏘아 붙이듯 던졌던 그말은
저주가 되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도는 구나.

언제쯤 너의 저주가 풀릴까
언제쯤 나도 너처럼 행복할 자격이 될까

너를 받아주지 못한 죄 값...
이젠 충분히 치루지 않았니



Tuesday, February 3, 2015

내 블로그는 반나절 늦는 미국 타이밍

한국에서 미국 시간 따르는 내 블로그
귀찮아서 몰라서 못바꿔

마음은 미국
몸은 한국

마음의 문은 닫혀있음
마음을 자신도 볼 수 없음

알고보면 이미 마음도 한국?
생각할 겨를도 없는 형국

시간, 너

너무 빨라
시간을 좀 늦춰보자

넌 내 뒤로 와 내가 앞 설께
나 보다 먼저가서 내 얼굴에 주름 짓게 하지마

아마 난 몸도 마음도 이미 한국

살아지는거...

그거 이미 동화
아직도 겪는 새로운 한국의 문화

너무 자주 바뀌는 인생의 챕터
내 몸은 내 영혼의 나루터

떠나 멀리 떠나 돌아 와도
내 몸은 그대로 있으리

시간아 내 뒤로 걸어와 주라
내 영혼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네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살래
어짜피 어디서든 살아지기 마련이니까
내 앞에 시간이란 너 한테 언젠가 다가가기 마련이니까
모두가 그렇게 되기 마련이니까

We all have an expiration date which no one knows our own. We just walk towards you.
Very slowly that not even your soul and a body can notice.
But we will know when the date has come right in front of our face.

Then, I will say hi

instead of bye



소통이 되지 않은 뇌

불면증에 늦게자는 나...
한참 꿈나라에 혼을 풀어놓은 늦은 아침..

초인종 소리에 꿈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곧 현실이라는 생각과 함께 부리나케 눈을 떴다.

이불을 확 제치고 두 다리를 침대 밖에 내려 일어서는 순간

다리 하나가 제어가 불가능 함을 느꼈다. 감각도 없었다.
찰나 였다.

난 쿵! 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난 순간 당황하여 다리를 움직이려고 하면서도 혹시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어진건지 의심하며 손으로 다리를 끌어 세웠다.

그 순간 또 한번의 초인종이 울렸고 다시 일어섰다.
그러면서 다리는 언제 그랬다는듯이 저림도 없이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건 한 3-4초 사이에 일어난듯 하다.

살도 별로 없는 엉덩이만 너무 아팠다.
방문자는 "신나는" 택배기사도 아니고 사용량이 줄었다며 온 도시가스점검자 였다.

도대체 뭐였나? 마치 남의 다리가 붙어 있던 것 같은 그 느낌....
그냥... 매달려 있는 고깃덩어리 같은 그 느낌...
뭐가 문제 였을까? 내 몸은 아직 취침중이었고 뇌의 명령이 그곳의 감각기관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
무서웠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전체 몸의 3분의 1이나 해당하는 다리 하나가 제어능력과 감각을 상실하며 느껴지는 그 낯설음...


몸과 뇌의 소통...
우리 몸의 모든건 뇌에서 제어 하고 무의식이 반영되어 원하는 행동을 바로 바로 하고 방어도 할수 있다고 배웠다.
그 찰나에는 내 다리 하나와 뇌가 소통을 잃었다.

(알고보면 그냥 힘없어서 넘어진것일 수도 있다...혼자 오버 하는것일 수 도있다. )





하루가 끝나가며 생각이 났다.

나의 마음과 머리는 얼마나 소통하고 있는가
과연 둘의 소통에서 과거에 내가 느끼지 못한 이런 단절이 있었을까?

몇년째 내 머리속에 맴도는 말,

"머리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한다..."
(손금에서... 혹은 '천재아니면 바보'라는 말을 듣는 그런 손금이다...)

이성적이여야 할때 감성적이 되고, 감성적이 되야 할때 이성적 판단이 들어선다는 그 말...
모순적이고 자기위선적인것 같은 이 말이 싫어 너무 부정하고 싶지만 맞는것 같아 날 속상하게 하는 그 말.

 오늘 처음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 신이 뭐든 그냥 '신'
아마 존재하지도 않는 신... 아마 니체의 이미 죽은 신

아무튼 난 그에게 날 바르게 인도 해달라고 했다.
믿지 않는 어떤 존재에게... 오늘 그렇게... 그와 소통했다.

최근에 만난 친구가 절에서 명상을 배운다고 한다.
이 어지러운 현세에 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인지도 모른다.

또 4시다 






Friday, January 30, 2015

김밥

난 김밥을 먹고 세번 운 기억이 있다. 


01 김밥

향수병에 타지에서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함을 내 몸의 세포조차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다가,
맛없는 홈스테이 엄마의 음식을 불평할 겨를도 없었을때...

지금은 사라진 OAC (13학년) 마지막 고등학교 해에 조금이라도 수학 점수를 잘 받아 보고자 오크빌에서 기차를 타고 토론토의 University of Toronto 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분에게 찾아가 과외도 받으러 다녔었다.

그 촌구석 오크빌은 한국음식은 커녕 아시안이 정말 없는 곳이여서 과외 장소인 U of T의 카페테이리아에서 김밥(일본식) 도시락을 보고 너무 반가워 그걸 하나 사서 부푼마음으로 첫 방문 후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조심스레 흔들리는 기차에서 난 더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고, 일본 간장을 찍은 김밥을 먹는 순간 잊고 있던 밥, 간장의 향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한참을 울며 누가 볼까봐 창쪽으로 얼굴을 돌린체 먹었던 기억이 난다.



02 김밥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동안 한국을 찾은 나는 인천 공항에서 청주 그리고 하룻밤만에 이미 부모님이 위치만 알아 놓으신 서울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이미 가구가 있고, 두어달만 있는 공간이고 서울을 잘 몰랐던 부모님은 비싼 돈을 내니 고시원도 살만한 곳이라 여겼나 보다. 난 빼곡히 들어서 있는 어두운 복도의 문들을 기억한다.

방을 보는 순간 내가... 고향에까지 와서 이런곳에서 지내게 되는구나.. 하고 나오는 눈물을 꾸욱 참았지만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것 까지는 참지를 못했다. 주제가 김밥이니 고시원의 상황을 자세히 열거 하지 않겠다. 나름 역삼동의 비싼 곳이었고, 다니려던 학원과 가까웠던것은(것만) 좋았다.

방은 정말... 정말... 작았다. 3평? 차라리 감옥이 나았을 것이라 진심으로 느꼈다.
혼자 짐을 풀고 멍하니 그 불편한 공간에 있다가 저녁시간이 되버린걸 알았다. 아 꿈에 그리던 한국에 왔는데, 그 많은 메뉴중 무얼 먹어야 하나...

한국은 혼자 먹는 사람을 뻘쭘하게 만드는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덜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었던게 많았는데, 난 김밥이 떠올랐다. 너무 먹고 싶던 한국식 김밥...
난 혼자 김밥을 무덤덤하게 아니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켰다.

김밥이 왔고 입에 넣는 순간 정말- 정말 기대치 않게 미친듯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목이 너무 메어 물었던 것을 바로 뺐을정도로... 눈물 콧물 다 나오고 주체가 되지 않은데, 조용했던 식당 아줌마들도 신경이 안 쓰였다. 난 그것들을 삼킬때마다 목이 너무 메여왔지만 결국엔 다 먹었다.
다 먹어야 했다.
이때의 김밥은 그렇게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고 오랜만에 온 한국에... 집에서 하룻밤만에 다시 새로운 도시에 와, 혼자 좋아 하는 음식, 그 별거 아닌 음식을 혼자 먹은 서러움과 복받침이었을 것이다. 뭐 먹으면서 제일 많이 울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03 김밥

지갑이 두둑할때 먹는 김밥은 맛있었다. 원할때 사먹으니까...
지갑에 돈이 없어서 먹는 김밥은 맛이 없었다. 돈없어서 사먹으니까...

집이 부도 나고 전공 살리려고 고군 분투 하며 스튜디오에서 전시 준비랍 시고 새벽 4-5시 까지 작업을 하면 저녁을 6시에 먹은 나는 너무 허기가 져 집에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집이 경매로 넘어가기 전... 우리 옆 건물의 일층은 24시 김밥집 이었다. 배가 고파 지갑을 보니 거진 1500 나온것 같다...
그 돈이면 기본 야체김밥을 먹을 수 있다. 난 아주머니가 호일로 길게 싸준 김밥을 통째로 들고 호일을 위 부터 까먹먹으며 집으로 올라왔다.

늘 먹던 김밥인데 맛이 없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 했다.
집은 일명 망했는데, 무슨 부귀를 누리겠다고, 무슨 이기주의로 작업을 하나... 부모님께 죄송하고 이제 인생이 이 24시 김밥 같아 지겠구나 하며 지금과는 너무 다른 앞으로의 삶이 펼쳐지며 집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울다 들어 갔다.  그때의 김밥은 반 이상 남겼다... 그 이후로도 난 그 어딜가나 '맛 없는' 김밥을 먹는 일이 잦아 졌다.


몇달 뒤면 한국을 떠난게 벌써 15년 전이 된다. 강물보다 빠른 듯 한 요즘의 시간은 이미 날 한국에서의 5년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한다.

10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반 토막 기간인 한국에서의 (곧)5년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 김밥은...고급화 되어 맛있어 졌다...

이젠 눈물과 먹는 김밥...
그만 하자.

안그래도 김밥은 원레 목이 메이는 음식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