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30, 2015

김밥

난 김밥을 먹고 세번 운 기억이 있다. 


01 김밥

향수병에 타지에서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함을 내 몸의 세포조차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다가,
맛없는 홈스테이 엄마의 음식을 불평할 겨를도 없었을때...

지금은 사라진 OAC (13학년) 마지막 고등학교 해에 조금이라도 수학 점수를 잘 받아 보고자 오크빌에서 기차를 타고 토론토의 University of Toronto 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분에게 찾아가 과외도 받으러 다녔었다.

그 촌구석 오크빌은 한국음식은 커녕 아시안이 정말 없는 곳이여서 과외 장소인 U of T의 카페테이리아에서 김밥(일본식) 도시락을 보고 너무 반가워 그걸 하나 사서 부푼마음으로 첫 방문 후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조심스레 흔들리는 기차에서 난 더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고, 일본 간장을 찍은 김밥을 먹는 순간 잊고 있던 밥, 간장의 향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한참을 울며 누가 볼까봐 창쪽으로 얼굴을 돌린체 먹었던 기억이 난다.



02 김밥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동안 한국을 찾은 나는 인천 공항에서 청주 그리고 하룻밤만에 이미 부모님이 위치만 알아 놓으신 서울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이미 가구가 있고, 두어달만 있는 공간이고 서울을 잘 몰랐던 부모님은 비싼 돈을 내니 고시원도 살만한 곳이라 여겼나 보다. 난 빼곡히 들어서 있는 어두운 복도의 문들을 기억한다.

방을 보는 순간 내가... 고향에까지 와서 이런곳에서 지내게 되는구나.. 하고 나오는 눈물을 꾸욱 참았지만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것 까지는 참지를 못했다. 주제가 김밥이니 고시원의 상황을 자세히 열거 하지 않겠다. 나름 역삼동의 비싼 곳이었고, 다니려던 학원과 가까웠던것은(것만) 좋았다.

방은 정말... 정말... 작았다. 3평? 차라리 감옥이 나았을 것이라 진심으로 느꼈다.
혼자 짐을 풀고 멍하니 그 불편한 공간에 있다가 저녁시간이 되버린걸 알았다. 아 꿈에 그리던 한국에 왔는데, 그 많은 메뉴중 무얼 먹어야 하나...

한국은 혼자 먹는 사람을 뻘쭘하게 만드는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덜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었던게 많았는데, 난 김밥이 떠올랐다. 너무 먹고 싶던 한국식 김밥...
난 혼자 김밥을 무덤덤하게 아니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켰다.

김밥이 왔고 입에 넣는 순간 정말- 정말 기대치 않게 미친듯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목이 너무 메어 물었던 것을 바로 뺐을정도로... 눈물 콧물 다 나오고 주체가 되지 않은데, 조용했던 식당 아줌마들도 신경이 안 쓰였다. 난 그것들을 삼킬때마다 목이 너무 메여왔지만 결국엔 다 먹었다.
다 먹어야 했다.
이때의 김밥은 그렇게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고 오랜만에 온 한국에... 집에서 하룻밤만에 다시 새로운 도시에 와, 혼자 좋아 하는 음식, 그 별거 아닌 음식을 혼자 먹은 서러움과 복받침이었을 것이다. 뭐 먹으면서 제일 많이 울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03 김밥

지갑이 두둑할때 먹는 김밥은 맛있었다. 원할때 사먹으니까...
지갑에 돈이 없어서 먹는 김밥은 맛이 없었다. 돈없어서 사먹으니까...

집이 부도 나고 전공 살리려고 고군 분투 하며 스튜디오에서 전시 준비랍 시고 새벽 4-5시 까지 작업을 하면 저녁을 6시에 먹은 나는 너무 허기가 져 집에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집이 경매로 넘어가기 전... 우리 옆 건물의 일층은 24시 김밥집 이었다. 배가 고파 지갑을 보니 거진 1500 나온것 같다...
그 돈이면 기본 야체김밥을 먹을 수 있다. 난 아주머니가 호일로 길게 싸준 김밥을 통째로 들고 호일을 위 부터 까먹먹으며 집으로 올라왔다.

늘 먹던 김밥인데 맛이 없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 했다.
집은 일명 망했는데, 무슨 부귀를 누리겠다고, 무슨 이기주의로 작업을 하나... 부모님께 죄송하고 이제 인생이 이 24시 김밥 같아 지겠구나 하며 지금과는 너무 다른 앞으로의 삶이 펼쳐지며 집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울다 들어 갔다.  그때의 김밥은 반 이상 남겼다... 그 이후로도 난 그 어딜가나 '맛 없는' 김밥을 먹는 일이 잦아 졌다.


몇달 뒤면 한국을 떠난게 벌써 15년 전이 된다. 강물보다 빠른 듯 한 요즘의 시간은 이미 날 한국에서의 5년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한다.

10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반 토막 기간인 한국에서의 (곧)5년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 김밥은...고급화 되어 맛있어 졌다...

이젠 눈물과 먹는 김밥...
그만 하자.

안그래도 김밥은 원레 목이 메이는 음식이므로...








Monday, January 26, 2015

불면증

오늘도 불면증
이미 시간은 새벽 4시

내일의 일자리에 잠이 안와
내일의 작업에 잠이 안와
내일의 고독에 잠이 안와

친구와의 오랜 수다
마음을 달래는 달콤한 케익
영혼을 달래는 그와의 대화
조금은 덜어진 나의 고민

마음은 다시 부자
마음을 나눌수 있는 친구가 있는 부자
외로움을 달랠수 있는 청하 한병 살수 있는 부자
언제나 스케치북에 손을 올리면 무엇이든 그릴수 있는 부자
많은 영감에 복받치는 부자
작업을 좋아해주는 지지자들이 있는 부자

난 정말 충만한 부자

그러나 잠은 안와
월세 걱정 안하면 잠의 신 힙노스는 나에게 올까

자신을 믿어야 하는 숙명의 직업, 작가
오늘도 신은 오지 않아
나를 믿어야 한다는걸 다시 깨달아

다시 한번 믿어봐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단편적인 문제들
이 또한 자신을 믿으면 지나가리라는 것을
이미 부자인 나에게 이 또한 가벼운 것임을

다시 주문해봐
자신을 믿어보라고
나의 정신 나의 몸은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하얀 백지 속,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자신임을


무엇으로 값을까
내 카드 빚을
내 부모 빚을
내 노동의 빚을
내 희생을 빚을
남에게 받은 마음의 빚을
남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이 충만했던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값을까

그래 마음은 부자라 알았는데
두 손발이 두 눈이 내 지갑이 너무 가난해

다시 불면증
*내일 다시 반복

Replay

*
*
*
*

Thursday, January 15, 2015

사주

사주를 보았다. 

옛날에 아무렇지 않게 '응 잘 맞추네' 하고 흘겨 넘기던 말들이
왜 나를 이해해 주는 말들로 들리고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지.

얼마나 감정을 억압하고 살았던 터인가.
꺼내 보지 않으려 했던 감정과 과거들이 원치 않게 꺼내질땐 눈물이 난다.

어렸을 때 부터 늘 난 강한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건 뭐 지다가던 행인이 톡 치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지경이다.

약해진 내 모습을을 볼때 마다 자신이 야속하고 밉다.
세월이 지날수록 우린 더 현명해지고 똑똑해지고 자신을 잘 이해 할수 있는 능력이 길러져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더 약해지는 자신을 본다.

뭐 누구나 그런 힘들게 부대끼는 삶을 살지만... 내가 너무 버블 속에서만 자란 탓이려니.
또 그렇게 스스로 일어날 주문을 외운다.


사주는 늘 똑 같다. 

그러나 난 올해도 본다.
혹시나 좋을까, 올해 덜 힘들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늘- 좋단다.

작년이 좋음의 기준이면 난 더 하고 싶지 않다.
힘들었던 제작년도 좋다고 했었다. - 스트래스로 응급실에도 갔었다.
그런데 작년이 더 좋을것이라 했다. . - 일수대출까지 알아보곤 했었다.

좋은 일도 많지만 힘든일들이 위로가 잘 되질 않는다.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

그래서 또 사주를 본다. 그 좋음의 기준이 올해는 어떻게 다른지. 언제 맞는 사주가 나오는지 보려고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좋-단다!! 

언제 부터인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현실의 불안이라는 독가스에 행여 불꽃이라도 튈까 조심스럽다.

그 독가스는 어둡고 습한 마음속  구석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것을 막을수 있는 뚜껑은 세상에 없는것 같다.
그것은 내 이성까지 도달하여 날 취하게 한다.
날 지배 하려 한다.

난 힘든 몸과 마음을 가다 듬어 독에 취해 나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또 외부에서 불꽃이 튀어 내 마음의 독가스에 불이 번져 완전히 소진되지 않도록 방어 해야 한다.
마음속의 그을음과 재를 치우는 방법을 모르므로...

그것은 힘이 든다.

그 안감힘 속에 이미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게 아닌가 또 자문한다.



사주에서 30대에는 굴곡이 많으니 참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완벽해 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어짜피 안돼니) 좀 내려 놓으란다.

이말이 더 위안이 될까는 두고 봐야 겠다.

난 좀 많이 지쳤다...

그래서 3년만에 이곳에 와서 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를 쓴다.

너무 힘든 30대다.
오늘도 불안이 날 지배 하지 않게 붙잡아 본다.

짧은 만남

단지 짧은 만남이었을 뿐인데...

그와의 기억에 대한 여운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다.

난 무엇이 그리 아쉬워 마음에서 그를 쉽게 놓아주질 않는가.

힘들다고 내가 먼저 보낸 사람 아니던가.


세월이 지날수록 외로움의 크기는 커지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늘 미숙한것 같다.

그가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날 괴롭힌다.

그가 받았을 상처를 걱정해서 인지

그는 단 한번도 진심을 내게 보인적이 없는 아쉬움 때문인지

마지막에 단 한마디의 인사조차 하지 않은 야속함 때문인지...


그가 참 보고싶은 밤이다.



Tuesday, January 13, 2015

불안한 30대



   모두가 그랬듯이 우리 부모님도 풍족치 못한 시절에 자라서 자식만큼은 편히 자라게 해주고 싶었으리라...

열심히 살아주신 아버지 덕에 필요한것은 다 갖추고 살았고, 때와 시기가 맞아 유학도 다녀올수 있었다.
물론 절약은 한다고 하며 살았지만 그때는 내가 얼마나 소비하는지에 대한 개념도 신경쓰지 않고 살았었다. 그저 심하게 불편하지 않은 그런 렌트방에서 필요한 재료들과 책은 부족하지 않게 사는 정도 였다.

재정이 좋아 지지 않으면서 조급한 부모님은 내가 바로 대학원을 가길 원하셨고, 미대생으로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것이다.

그렇게 많이 부족한 나는 대학원은 잘 마쳤고, 경력등을 이유로 가족의 귀국요청을 뒤로 하고 도시로 갔다. 돈이 너무 없었으나 벌기는 모두가 너무 힘든 2008년...지원해 보지 않은 업종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그런 험한 일을 못할 것 같아 보여서나, 외국인 이어서나, 나의 학벌이 높아서나, 그 도시안에서의 경력을 따지며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전공 분야에서도 그랬다. 공모전이며, 레지던시며, 시도치 않아본 기관이 없는것 같다.


과외등으로 전전 긍긍하다가 지친몸과 마음으로 한국에 귀국 하자마자 집은 부도로 정신이 없었다. 엄마가 모아놓은 돈까지 30년 일궈온 회사 살리겠다고 쏟아 부으신 아버지의 어깨는 더할 나위없이 위축되어 보였다.

많은 사기와 배신, 상실, 공권력등의 회오리는 온 가족의 혼을 쏙 빼놓았다.

가족간의 불화도 늘었다. 가정 속 경제(그것이 적거나 많거나)의 유지가 얼마나 서로의 정신적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몸소 겪었다.

여러 이유와 죄책감에 완전 독립한 나는 30대가 되어야 돈이 없음을, 돈이 없는 공포를 처음 느꼈다. 늘 난 물질적 욕심이 많지 않으니 없이도 잘 지낼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했던 어린믿음은 현실에서 무너졌다.
삶의 그 모든 스탠다드를 내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 잘 지켜지는건 아니여서 힘들고 같이 내려가는 자존감까지 붙드는게 힘들었다.
버릇과 익숙함들은 후회, 허탈, 허무감으로 돌아왔다.

있을때 먹는 칼국수는 순수히 즐기러 가는 거지만 없을때 가는 느낌은 또 다르다.


30대는 사회의 기대에서는 대리급, 과장급을 달고 저축을 하며 인생의 안정권으로 접어든다.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겠지.

난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제로-플러스를 한달에도 몇번을 왔다갔다 하는걸 본다.
랜트비가 몇십만인데 월세낼 시기에 통장에 단돈 몇 천원만 있을 때는 하늘이 샛노랗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도 사회가 원하는 30대, 가족이 원하는 30대의 길을 가지 않는 -  스스로 택한 길을 가는 나 로서는 부모에게 기댈 염치도 없고 형편상 그럴수도 없다.

여행과 사랑은 사치였고, 내 몸 하나 추스리고,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어찌어찌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래, 지금껏 버티고 있는 나를 보면,  무엇이던 간에 어디로부턴가 큰 도움을 받고 있는 생각이 든다.
항상 한 문이 닫힐때 굶어 죽지말라고, 작업 포기 하지 말라고, 또 다른 한 문이 열렸다.
세상은 열정과 능력만이 밥먹여 주지 않는 다는건 어려서 부터 알고 있던 나로서는 더더욱 그런 기회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어머니 말이 맞다. 다들 내 나이때는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손자도 보여드린다.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난 참 이기적이다.
다 그만두고 취직을 해서 가족을 도울까 몇만번 고민했다. 난 장녀니까.

하지만 이뤄 온 모든걸 중단하기엔 그동안 너무 많은걸 걸었다. 시간, 돈, 열정, 내 청춘, 그리고 자아.

그렇게 예술을 하는것에 자부심을 갖고 앞으로만 나아가던 내게 처음으로 내가 해오던  모든것들이 내가 스스로 파놓은 무덤 같았다.

무덤이 맞다. 땅굴 같이 긴 무덤. 빛이 잘 들지 않는 무덤. 혼자 좋다고 십몇년을 파놓은 무덤.
돌아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 감히 돌아가기가 너무 무섭다.
차라리 어디로 나올지 모르지만 계속 파고 가는게 낫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전부 이고 해왔던것들 아닌가.  무덤이 무덤이 아닌, 길이 되어 나 스스로를 인도 하는건 지극히 내 손에 달려있었다.
긴 어둠 속에서 어딘가의 밖으로 나와 빛을 보았을때, 거긴 어디일까? 누가 내 곁에 있을까? 난 그곳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과연.. 나에게 올까?


중학교때 원래 없던 사람이 갑자기 돈이 생기면 잘 적응 하는데, 원래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없으면 적응하기 무척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난 그말을 참 오래 곱씹은 기억이 있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있던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라 생각했고, 그런것은 마음먹기 달려 있다고 믿었었다. 인생에 물질적으로 꼭 필요한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꿈이 평범함이었다. 굴곡이 없는... 원래 없는 것도 싫고 많은것도 싫었다. 그때 부터 난 늘 돈이 있다 하더라도-그래봤자 용돈- 삶의 언젠가는 그것도  없을 수 있음을 인지 하고 살았던것 같다. 돈이란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잠시 머무는 존재들 아닌가.

부모님의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굳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살진 않았다.
그러나 커가면서 공부란 것을 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겪고 보고 배웠다. 이것들은 돈이 든다.
이 가치들을 계속 영위 하려고 해도 돈이 든다. 난 어느새 얻은것들을 유지 하고 싶어하는, 과거에 내가 생각한 '욕심장이'가 되어있던 것이었다.

나이 30대가 되어서 다시 꿈꾸어 본다.
10대 때 상상하던 그 평범함을.....








Sunday, January 11, 2015

상처

상처... 그건 내가 덮어주기엔 너무 큰 일이겠지? 


완벽해 보이던 A씨는,

사실 두세겹도 아니고 한겹 들추어 보니, 성한 곳이 없는 멍과 상처 (Bruise) 투성이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 상처들의 출처들을 일일이 풀어주는 자상함은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상처일수록 되새기는건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도움이 안될수 있으리라.


그러다 누군가 조금 가까이 다가가다가  자칫 옷깃이라도 상처에 스치면 그는 아주 날카롭게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많이 아팠어요?" 라고 되묻고 싶지만 그의 상처를 더 자극할 수 있을까봐 내심 조심스럽다.
그는 그 멍과 상처들의 존재를 주술처럼 스스로 잊으려 한다.


그러다가  다가간 사람이 의도치 않게 스치기라도 하면 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가간 사람은 다시 그와 거리를 둔다.

의도치 않게 상처를 건드린 이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더- 더-
거리를 두어야 하는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A씨를 돕는 방법은 그저 조용히 상처들을 아물기를 바라만 봐줘야 하는것인가?

A씨는 언젠가 누구에겐 그 상처들을 다 드러내고 치유를 위해 손을 내밀까?



A씨의 건승을 진심으로 빈다.



완벽한 그

꿈에서나 보았을까...
아니다
꿈에서도 본적이 없다.
내 주제를 알고 살자라는 나의 신념에 감히 그런 형상을 그려본적도 없는...

몇 종교에도 그렇지 않은가, 시각적으로 어떤 이미지로도 형상화를 금지하는...
나의 이상형의 남자는 그러하였다. 얼굴이 없는, 그러나 느낌은 충만한.

그래도 '기왕이면' 하는 리스트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어깨가 넓고, '기왕이면' 키도 나보다 크고, '기왕이면'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것들...
내면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겉에서 보여지는 일명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고 싶진 않았다.
그런면에서 몇번은 만나봐야 알수 있는 그 내면성은  어찌보면
빨리 쉽게 찾을수 있는 조건좋은 남자에 비해  난 눈이 무척 높은 것일 수 있다.

4년,
한국에 들어온지..
힘들고 지치고 외로운.. 적응을 하고 있나 하는 질문 조차 할수 없던 매정히도 빠른 세월들.
그리고 아직도 대답할수 없는 질문:

 "나, 적응... 잘 하고 있는거지?"

그동안 한국에서 남자와의 인연에 별다른 노력을 안하고 살았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사랑은 감정적 사치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나와 가치관, 인생관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내가 '기왕이면'하고 바랬던 모.든.걸. 충족하는 남자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인정을 받는 것 같았고, 자신감도 넘치는 흠잡을 곳이 없는 남자였다.
누구라도 탐낼 그런 남자.


내가 못하는 특성을 그는 직업으로 삼고 있었고, 그가 잘하지 못하는건 내겐 직업이었다.  또한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알았으며, 예술을 이해 하였으며, 식습관 까지도 비슷했다.


그는 이보다 더 할수 없는 나에게 완.벽.한. 남자였다.

얼굴없던 나의 이상형에 그는 그렇게 갑자기 내인생에 들어와 퍼즐처럼 완벽하게 맞추어 주었다.

 우린 아주 비슷했으며 아주 반대의 매력에 끌렸다.



그러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난 강가의 둥근 넙적한 돌이었고,
대리석의 반짝이는 예쁜 돌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가시돋은 돌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난 그의 가시에 찔렸고,  언젠가는 스스로가 만들어지는, 이미 내 모습을 사랑하는 자신의 돌의 모습이 아닌, 그의 가시로 찔리고 파여 그가 만들어놓은 돌의 모습이 될것 같았다.


그가 그의 가시로 나를 타지마할을 조각해 낸다한들,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이면 다 소용없는일 아닌가?

겁이 났다.

그의 사랑에도 의심을 하였고, 불안정이 내 숨을 조여 왔다.

몇년전 미국에서 유행하던 말, "He's just not that into you" 라는 말이 조롱하듯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문화적 다름... 이건 인정하기 싫지만 보고 겪고 말았다.

그를 통해 보게된 나는 미국적이였고, 그는 한국식 경쟁의 핏싸움에 얼룩진 남자였다.


그를 통해 본 나의 자존감.
또다른 방향과 방식으로 나를 배운다.

그 상처... 그건 내가 덮어주기엔 너무 큰 일이겠지?



불안은 독이다.
독에 취해 난 그렇게 그를 보내 버렸다.

untitled

Untitled.

굳이 좋던 나쁘던 지금의 감정에 타이틀을 혹은 어떤 형용사를 달고 싶지 않은..그런 날이다.

Friday, January 9, 2015

캐나다 그 아득한 과거

캐나다라는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그저 아득한 과거속의 나라같다.

저녁 파티에서 내가 살던 오크빌과 내 학교를 알며 내 홈스테이 가족중 아들이 다니던 학교를 다니고, 그곳을 누구 보다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졸업해서 떠나자 마자 그 동내와 인연이 닿았다고 했다.
우린 한참 10년도 더 지난 서로의 캐나다 이야기를 했다.


묘하다...

난 그 좋은것만 생각하면 무한히 좋고, 싫은것만 생각하면 무한히 싫었던 그곳의 기억을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캐나라라는 기억의 서랍장엔 전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폴더들이 너저분이 섞여 있다.

거기서 완벽한 폴더는 아마 토론토에서 만든것 이였을것 같다.

아쉽게도 그 폴더는 꺼내볼 일이 거의 없다. 그냥 완벽히 그곳에서 언젠가 꺼내어질때를 기다리며 앞으로도 꽤나 먼지가 쌓이겠지.

이상하다 기억과 감정이란게 정리 되지 않은 서랍장을 열 기회가 더 많다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