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9, 2016

수트

그는 걷고 있다.

마치 영화의 슬로우모션처럼 그는 그렇게 천천히 걷는다.
나의 귀는 그의 잘 닦여진 구두가 만들어 내는 또각 또각 소리에 집중한다.

세상이란 무대엔 그 혼자이고, 그를 중심으로 둔 배경은 모두 하얗다.

검은 양복, 아주 매트한 그의 수트는 손목에 하얀 셔츠의 소매를 적당히 내밀고 있다.
짧게 깎아 올린 그의 머리끝 목선을 따라 단호히 존재감들 드러내는 하얀 카라.


그의 힙을 살짝 가린듯한 두 갈래로 나누어진 잉글리쉬 컷은 그의 구두소리와 같은 리듬으로 펄럭 거린다.

일자로 뻗은 강한 라인의 바지선은 그가 한 걸음 내 딛을때마다 그의 넓은 허벅지 라인을 보일듯 말듯 드러내고, 아래 바짓단은 적당히 춤을 춘다.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가던 그는 이미 무대를 벗어나고
아, 그 아름다움에 빠져 얼굴은 보지 못 했구나...

그래도 괜찮다.
이미 그의 수트가 그에 대해 다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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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요즘 을지로와 여의도에 일을 다니며 퇴근시간의 양복입은 남자들을 많이 접한다.
미국남자들에 비해 난 한국 남자들이 수트를 잘 입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내 혼이 빠질 만큼. 넋이 나가 도록 바라본다.
수트는 진정 인간사에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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